끝에서 기다릴게

“방법이 있겠지.” “소용없어.” 유타는 안락의자에 누워 눈을 감았다. 누군가를 말리는 것조차 귀찮아 보인다. 여주는 더 투명해진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신체 말단부터 투명해지는 몸이 새삼스럽게 실감 났다. 유타가 먹다 남긴 사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사과가 손가락이 닿은 곳부터 아주 천천히 검게 물들었다. 어느새 반쯤은 부식된 사과가 가루를 뿌린다. ...

처음 보인 건 끝없는 사막이었다. 여주는 낯설면서 익숙한 풍경을 눈에 담았다. 국경에 살 때 지겹도록 보았던 사막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바람이 불자 모래가 일어 볼을 건드렸다. 그게 간지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몸이 이상했다. 무언가 달랐다. 피투성이였던 옷은 어디에 가고, 지금 입은 것은 온통 흰 상의에 흰 하의였다. 말랑한 천을 만지작거렸다. 여주는...

*잔인한 묘사가 있습니다 여주는 고개를 돌렸다. 어디든지? 아무리 머리를 뒤져보아도 갈 곳이 없었다. 대신 사람들을 떠올렸다. 아저씨, 할머니, 사쿠라, 마크, 도영, 그리고…. “동혁이는요. 동혁이는 어떻게 됐어요?” 도영의 눈썹을 늘어뜨렸다. 그리곤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다 쉰 목소리가 절망적인 상황을 읊었다. 이미 저택으로 센티넬들이 쳐들어갔다고 ...

“모든 것은….” 노쇠한 남자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지구본의 남자의 주름진 손에 쓸렸다. 손끝에 푸른 대륙이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세상이 이렇게 삭막해지기 전을 표현한 지도였다. 남자는 슬며시 웃다가 다시 표정을 굳혔다. 아주 먼 옛날에는 이 지구 전체에 사람이 퍼져 살았다고들 했다. 한 때 저 드넓은 바다도, 사막도 가지 못하는 곳이 없었다. 이...

여주는 눈을 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흰 천장이 눈 아프게 들어왔다. 띵한 머리를 붙잡고 일어났다. 부스스한 머리를 정돈하고 싶지도 않았다. 오늘이 며칠이지.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들어본 지도 가물가물하다. 무심코 강화유리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창문은 첫날 이후로 바깥을 보여주지 않았다. 비치는 건 제 얼굴뿐이었다. 곧 죽을 것 같이 피곤해하며 코피...

숲을 거침없이 뛰어다녔다. 발바닥이 날카로운 바위에 쓸려 찢어졌다. 폐가 거칠게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럴 때마다 속 안 내장이 수천 개의 바늘로 찔리는 것 같았다. 빨리 나가지 않으면 폐가 아예 기능을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은 사냥감을 하나도 잡지 못했다. 수확 없이 빈손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동물보다 뛰어난 청력 하나에 기댔다. 여주는 빠른...

“난-.” 동혁이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말을 끝내기도 전에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여주는 감각을 날카롭게 세웠다. 센티넬 한 둘이 그러는 게 아니었다. 여주는 재빠르게 동혁이의 후드를 다시 씌웠다. 몇 사람들이 입구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슬그머니 앞으로 몇 발짝 달려가 목을 쭉 내밀었다. 지상에서 지하로 내려오는 계단 쪽이 어수선했다. 사쿠라가 밖에서...

“… 오랜만이네.” “응.” 희미한 정신을 붙들고 주위를 살폈다. 다른 사람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누군가와 마주친다면 같은 센티넬이라고 둘러대야 하겠지. 그런 얄팍한 거짓말이 먹힐까? 미겔 같은 멍청한 부류라면 모르겠다. 유타는 대번에 눈치챌 것이고, 마크도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여긴 어떻게 왔어.” “내가 못 올 데 왔어?” 센티넬만 가득한 소...

“이거 놔.” “여기! 우리들의 미래가-.” “놓으라고!” 거세게 콧수염의 팔을 떨쳐냈다. 화끈거리는 손목을 무시하고 발을 내밀었다. 서둘러 앞으로 뛰어가며 주위를 살폈다. 동혁, 동혁아…. 동혁이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낯선 사람들만 가득했다. 어딜 봐도 모르는 얼굴들이었다. 혼란스럽게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내가 잘못 본 건가? 그럴 리 없어. 내가...

앞을 가로막는 벽은 제게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천천히 비상구의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몇 사람들과 마주쳤지만, 그 사람들은 모두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손안에서 사납게 휘몰아치던 금빛 타래 때문이었다. 내가 폭주 중인 걸로 보일까? 아닌데. 그 어느 때보다도 이성이 또렷했다. 살아생전 이토록 능력이 자유자재로 써진 적이 없었다. 도영도, 동혁이도 ...

흰 건물 어느 끝방에 갇혔다. 누가 그리하라 시켰는지는 몰랐다. 어차피 도영 아니면 동혁일테니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안대를 하고 끌려간 탓에 이곳이 몇층인지도 알 수 없었다. 단지 창문 아래를 내려다보고 여기가 얼마나 높은지 거리를 가늠해볼 수만 있을 뿐이다. 심지어 창문엔 철창도 달려 있었다. 내 전에 갇힌 사람도 탈출을 꿈꿨을까? 추측해봤자 부질없었다...

“태어나는 가이드의 수가 점점 줄고 있어요. 센티넬은 반대로 느는 추세입니다. 이대로 가면 앞으로 태어날 신생아의 1/4이 센티넬로 태어날 겁니다.” 동혁이 도영이 하는 말을 들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두운 창에 얼굴이 유령처럼 비쳐 보였다. 문득 그게 아이들 속 이야기에 나오는 괴물처럼 떠올랐다. 동혁은 유리창에서 시선을 뗐다. “결국 인구의 1/4을 ...